0 Flares Facebook 0 Twitter 0 Google+ 0 Email -- 0 Flares ×

사진1

오랫동안 쓰였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집위원 이슬샘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늘은 곧 비가 올 듯 흐렸지만 거리에는 단풍이 빨갛게 물들어 학교는 제법 근사한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영신관에는 ‘응답하라 2014’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붙었고, 캠퍼스는 중앙대학교 14학번이 되기 위해 논술고사를 보러 온 학생들과 학부모들로 붐볐다. 나는 인터뷰를 위해 법학관으로 향했고 지하 3층에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 지하 3층 버튼은 없었다. 그랬다. 엘리베이터조차 닿지 않는 그곳, 지하 3층에 시설노동자들은 ‘유령’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가을의 절정에 오른 캠퍼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회색 기계들로 가득 채워진 기계실은 칙칙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햇빛 한줌 들어오지 않는 곳. 그 적막한 공간을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간간히 배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시설노동자 김정갑 씨를 만났다.

김정갑 씨가 처음부터 기계 설비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계엄령이 선포된 시대에 자랐다. 학창시절에는 직업 군인이 되어 장교가 되고 싶었다. 왜 직업군인이 되고 싶었냐고 물었다. “직업 군인이 힘 좀 있고 그러니까 좋아보이드라구.” 그는 대답과 함께 수줍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의 표현대로 ‘세월이 세월인지라’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사회도 아니었고 가정형편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 꿈은 가슴 한 편에 묻어두었다.

사진2

상고를 졸업하고 나서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도자기 회사를 운영해보기도 하고 조그마한 공장을 차려보기도 했다. 운이 없었던 것일까. 사업에서 거듭 쓴맛을 봤다. 1983년, 그의 나이가 마흔이 다 됐을 때 부산에서 상경했다. “밑바닥 생활부터 안 해본 게 없어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한다는 듯 그의 손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포장마차부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춰 나중에는 레스토랑을 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의 인생의 고요를 깬 것은 아내의 암 소식이었다. 아내의 암 투병으로 운영하던 레스토랑을 정리했다.

아내의 수술 후 그도 한동안 일을 쉬며 집에서 지냈다. 몇 십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왔기 때문일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업했을 때의 경험을 살려 기계, 시설 쪽으로 일을 찾았다. 처음에는 한 입시 학원 본사에서 일했다. 그때부터 학생들에게 애착이 생겼다. 학원에서 시설 일을 하면서 전문성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에 자격증 공부를 했다. “24시 근무를 했거든요. 하루 24시간 근무를 하면 그 다음날엔 쉽니다. 그럼 그 쉬는 날에 학원을 다녔어요. 일주일에 3회씩. 공부 열심히 했어요. 그렇게 자격증 따는 데 1년이 걸렸습니다.” 나이 먹고 공부한다는 게 여간 쉽진 않은 일이었다. 밤에 야간 근무를 서면서 침침한 눈으로 짬짬이 책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사비를 들여가며 자격증을 취득하고 2010년 겨울, 직장을 중앙대학교로 옮겼다.

“학교에서 일하게 됐을 때,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자신이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기뻤다. “여기 시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서 학생들이 다 자식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즐겁게 출근을 해요.” 물론 일이 힘들지 않은 건 절대 아니다. 인원에 비해 과다한 업무도 업무지만 화장실 변기가 막혔을 때 뚫는 일 같은 잡무도 한다. 기사로서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다른 데서는 기사로서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런 일을 빨리 처리해줬을 때 학생들의 불편이 없어지니까 한다고 답했다. 원래 출근 시간도 8시이지만, 그보다 삼사십 분 일찍 와서 회의를 하고 기계를 돌린다. 9시부터 수업이 있는데 적어도 수업 1시간 전에는 기계를 돌려야 학생들이 ‘훈훈’한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시설 배관이 터졌다든지 기계 뭐 이런 게 안 돌아가면 급히 조치를 취해서 학생들이 겨울에는 따뜻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해주고. 그럴 때 학생들이 ‘고맙습니다’, 교수님들이 ‘고맙습니다’ 할 때 가장 보람 있어요. 그런 말 한마디가 최고죠. 그 이상 더 뭐가 필요 있겠어요.” 회사를 위해서가 아닌 학생들을 위해서 일한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학교와 학생에게 얼마나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느껴졌다.

요즘 같은 겨울이 춥긴 하지만 여름보다는 근무하기 낫다고 했다. 겨울에는 야간에도 보일러를 돌려야하기 때문에 추가 인원을 더 채용한다. 그러나 여름에는 추가로 인원을 채용하지 않기 때문에 낮에 일하는 사람들이 밤 10시까지 연장근무를 해야 한다. 토요일, 일요일도 그렇다. 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출근한다. 그러나 여름이나 휴일이나 추가 수당이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은 일이 있으면 당연히 나와서 공짜로 일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1사진 3

노조 가입 이전에도 이런 부당한 대우에 목소리를 내봤다. 그때마다 학교는 학교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 노동현장은 늘 학교였다. 학교와 계약관계를 맺는 용역업체가 바뀐다 해도 기존 시설노동자들은 고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지금 회사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회사는 3년 동안 월급이 안 올랐으니 이번에 학교와 재계약을 하면 월급을 인상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최저 입찰가로 지금의 회사가 들어왔다. 월급은 오르지 않았다. 청소, 방호노동자들은 월급이 올랐다. 학교 총무팀장을 찾아가 이런 사정을 말했더니 자기네들 관할이 아니라며 시설팀으로 가보라고 했다. 시설팀에서는 당신들 계약에 관한 문제는 학교와는 관련 없는 일이니 용역회사에 따지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래서 학교가 야속하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작업복입고 궂은 일하니까 저거가 다 편안하게 교수님들은 학생들 가르치고, 학생들은 수업 받고, 교직원들은 업무를 보고. 그 조건은 그 밑에서 우리가 다 만들어주고 있는데, 느그들은 있으나 마나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학교 내 구성원 취급도 안 해주니까 야속하다는 겁니다.”

학교 측이 미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정년을 낮춰 용역회사에 만 56세 이하로 채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인력 충원이 안 되자 정년을 60세로 올렸다. 올해 계약할 때도 나이가 많다 해서 그를 비롯한 몇몇 노동자들은 재계약대상에서 제외됐었다. “학교 측에서 찾는 젊은 사람들, 여기 있다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해서 나가지, 여기 애착을 가지고 안 있어요, 절대. 왜? 급료도 적고 화장실 같은 데까지 청소 다하고. 그런 기사들 없거든요. 그래서 다 나가는 거예요. 우리 나이든 사람들은 ‘괜찮다. 학생들을 위해서 하는 거다’라고 생각하니까 일하는 거예요.”

용역회사에도 부당한 처우 개선을 요구해봤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회사는 돈이 한 푼도 안 남는다는 말과 ‘싫으면 그만 두든가’라는 무시였 다. “당신네들이 나이 들어서 와서 소일거리로 하면서 이게 봉급이 적으면 당신네들이 나가면 될 거 아니냐”는 상무의 말에 속상함과 모욕감을 느꼈다. 기술자로서 자신이 하는 일을 소일거리 취급하는 멸시에 자존심이 상했다. 학생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학교를 하나의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에게 돌아온 차디찬 말들에 억울하기도 했다. “회사가 사정이 이러이러해서 힘드니 지금은 힘들어도 다음엔 꼭 반영시켜주마. 어떻게 반영시켜주면 좋겠느냐 뭐 이런 걸 의논을 하면 회사에 신뢰도 생기고 같이 헤쳐나가보자 이러는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지난 추석을 앞둔 며칠 전에는 회사 사람이 와서 “(회사에) 단돈 100원만 남아도 내가 개새끼다”라고 했다. 당신네들이 이런 요구를 하는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명절 때마다 주던 종합선물세트도 못주겠다하고 돌아갔다. 이번 추석에 시설노동자들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 용역회사는 두 명의 직원을 새로 고용했다. 그 두 명은 사장의 지인이다. 이들은 자격증이 없고 기계를 다룰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기존에 있던 시설노동자들은 업무 외로 이들을 가르쳐야한다. 시설노동자들의 업무가 가중됨에도 회사에서는 이들과 기존 시설노동자들의 임금을 동일하게 준다. “보일러 ‘보’자, 기계 ‘기’자도 모르는 사람들을 데려와서 우리한테 가르쳐주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 사람들 가르치려고 여기 들어왔습니까. 아니잖아요. 근데 회사는 늘 그런 식이에요.” 또한 자격증 있는 사람들은 회사에서 주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러 오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회사가 자격증 없는 사람을 고용하면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고 확률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하는 자신에게 돌아온 차디찬 말들에 억울하기도 했다. “회사가 사정이 이러이러해서 힘드니 지금은 힘들어도 다음엔 꼭 반영시켜주마. 어떻게 반영시켜주면 좋겠느냐 뭐 이런 걸 의논을 하면 회사에 신뢰도 생기고 같이 헤쳐나가보자 이러는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지난 추석을 앞둔 며칠 전에는 회사 사람이 와서 “(회사에) 단돈 100원만 남아도 내가 개새끼다”라고 했다. 당신네들이 이런 요구를 하는 자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명절 때마다 주던 종합선물세트도 못주겠다하고 돌아갔다. 이번 추석에 시설노동자들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학교와 회사의 대우에 참을 수 없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두려운 마음이 컸다. 가족들도 응원하는 한편 걱정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리는 자기 자신이 찾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아야 하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야.” 옆에 노동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노동자가 이에 덧붙였다. “우리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이거는 꼭 관철시키고 나가야 다음에 여기서 일하러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도 우리처럼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자신들의 희생도 감수하겠다 말하는 그들의 눈빛이 결연해보였다.

사진 4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학생들이 우리들의 처지를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행정실 교직원들이 너무 자기네들 위주고 우리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안 해요. 학교가 두산으로 넘어가면서 이익창출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진짜 너무 한 거예요. 그래서 학생들이 우리 노동자들 실태를 알아서 바른 소리를 좀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람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나에게 핸드폰 배경화면에 있는 자식과 손주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다른 노동자들은 또 자랑이 시작됐다며 웃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는 그가 간간히 연주하며 배우고 있다는 기타와 악보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나이는 들어도 그렇잖아요. 항상 젊은 마음으로 살아야 활력소가 되지.” 그렇게 말한 뒤 그는 소탈하게 웃었다.

사진5

대학원 지하 2층은 미술 실기 용품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로 가득했다. 주의를 기울여 찾지 않으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칠만한 곳. 계단 밑 조그만 문에 적힌 ‘휴게실’이란 글자만이 청소노동자들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휴게실 안은 외풍이 심해 외풍차단비닐을 붙여놨지만 냉냉함은 여전했다. 이따금씩 바람이 창문을 치고 달아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서울경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중앙대분회(중앙대분회) 분회장 윤화자 씨를 만났다.

그녀는 2008년 5월 중앙대학교에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 2009년부터 1년 동안 학교 일을 그만두고 개인장사를 하다 2010년 11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젊었을 때는 그냥 주부였어요. 그러다 IMF가 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렵기 시작해서 일터로 나섰죠. 맨발벗고 뛰었지. 가정형편이 어렵게 되다 보니까.” 처음엔 식당 장사를 했다. 호프집을 운영하기도 했고 보험회사에 다니기도 했다. 그렇게 아들 두 명을 대학까지 졸업시켰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학교 청소 일을 시작했다.사진6

그녀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 집에서 나오면 거리는 아직도 어둑어둑하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와 학교에 도착 하면 6시 언저리다. 그때부터 일을 시작한다. 학생들이 오기 전에 강의실을 다 청소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일 하기 정말 힘들어. 외곽 청소할 때 신경질도 나고, 속상하고 그렇지. 장갑 끼고 일해도 손 시리고 트고.” 그녀는 인터뷰에 답하면서 자신의 거칠어진 손을 비비고 있었다.

아프기라도 하면 서러움은 더해진다. 회사의 ‘아니꼬우면 그만두라’는 식의 태도에 불안감이 항상 마음 한편에 존재한다. “아파도 울면서 참고 일하지. 본인 자신이 초라하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서럽기도 하고. (그런 맘이) 없다면 거짓말이지.” 입원한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그만 둬야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도 일하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결근하기라도 하면 월급에서 깎이기 때문에 쉬는 시간에 침을 맞으러 잠깐 잠깐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일을 제대로 다 못하니까 다른 언니들이 봐주기도 했어요. 미안하고 고맙죠. 회사에 이런 거 말 못해요. 아니꼬우면 내가 그만둬야하니까.”

“청소노동자라서 무시당한 경험이 있다.” 인터뷰한다는 소식을 듣고 온 청소노동자 A씨가 말했다. 그녀의 몸은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녀는 살림을 하다 집안에 한 푼 이라도 더 보탬이 될까 해서 청소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문제의 사건은 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 그녀는 학교에 행사가 있어 특근을 했다. 특근을 마친 후 집에 퇴근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한 교직원으로 행사장에 있던 자신의 외투가 없어졌는데 못 봤냐는 내용의 전화였다. 그녀는 자신을 의심하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또

 A 씨가 청소노동자로서 다른 학내노동자에게 무시당한 경험은 이뿐만이 아니다. 한번은 한 교직원이 배달 음식을 시키면 같이 오는 된장국을 주며 “이거밖에 드릴 게 없다”라고 했다. 거지취급을 받았다는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 국그릇을 받자마자 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우리는 떳떳하지 청소하는 거. 우리가 돈을 받고 하지만은 학교를 깨끗이 해주는 거잖아요. 근데 아직도 교직원들 중에는 이렇게 우리를 하찮게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있을 때마다 꾹꾹 참았죠. 속상해도 속으로 울었죠. 겉으로 운다고 해서 누가 알아줘요?”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무시당한 경험들이 깊은 상처가 되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한 번씩 그 기억이 문뜩문뜩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엉켜버린다는 그녀는 화에 여전히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자신의 번호를 알려줬을 다른 노동자에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옷 못 봤다고 했지. 그러니까 뭐라는 줄 알아요? ‘아주머니가 내 옷 가져가도 못 입어요’라고 하는 거야 글쎄.” 그 교직원은 이미 A 씨가 자신의 옷을 훔쳐갔다고 확신하는 듯 말했다. 자신이 ‘하찮은 청소노동자’이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오해받은 것에 울분이 터졌다. 그 다음 날 그녀는 그 교직원을 만났다. 알고 보니 그 교직원은 외투를 자신의 근무지에 두고 왔던 것이었다. 그러나 사과의 전화는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외투를 찾았으면 나한테 전화로 찾았다고 미안하다고 한마디 할 수 있지 않았냐’고 A 씨가 묻자 그 교직원은 ‘자신을 언제 봤냐’는 식으로 무시하고 떠났다. 가슴에서는 화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끓고 있었다. 자신의 억울함에 대해 알리고 싶었다. “내 모가지가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신문에 띄우고 싶었어.” 이 사연을 들은 가족들은 일 하러 나가는 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자신이 덮어버리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화를 속으로 삭혔다. “노조가 있으면 말 했어요. 근데 노조가 없었으니까, 혼자라서 말 못했어요. 말할 데도 없었고.”

청소노동자들은 학생들에게 무시당한 경험도 털어놓았다. 금연구역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흡연을 많이 해서 청소하기 힘든 구역이 있다. 어느 날 한 청소노동자가 그곳을 치우고 있을 때였다. 한 학생이 담배를 피우다 뱉은 가래침이 청 소노동자의 손등에 떨어졌다. 올려다보니 그 학생은 무심하게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남기곤 떠났다. 인간으로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사진7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엔 힘들어도 말도 못했다. 혼자서는 힘들다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학교와 회사의 태도가 걱정되기도 했다. “처음에 노동조합이 생겼을 때 묘했어. 이게 꿈이야 생시야. 얼떨결에 말한 거지 들뜬 마음에.” 노동조합 출범식 날 마이크를 잡았을 때 감회를 물으니 윤화자 분회장 은 이와 같이 답했다. 노조를 만들 때 말도 많았다. 잘린다는 둥 만다는 둥. 위법이라는 둥 불법이라는 둥. 오만생각이 다 들었다고 했다.

두려움이 차츰 자신감이 됐다. 처음엔 ‘밑져야 본전’이라 는 생각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생전 처음 발언하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노동조합이 생겨서 떳떳하니까.” 윤화자 씨는 노동조합 결성 후 아직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심적으로는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편하다고 했다.

다른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이 생겨서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청소노동자 A씨는 “내가 그래도 지금은 노조가 있으니까 큰소리 칠 수 있는 거예요.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젊었을 때 앞에 나서진 않았어도 바른 말은 하는 편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허물없이 살고 싶은 마음에 젊었을 때처럼은 행동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노동조합이 생겨 떳떳해졌다는 그녀는 이야기를 다 털어 놓은 후 마음의 짐을 덜었다는 냥 한결 가벼운 모습이었다.

윤화자 분회장은 분회장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아니라고 했다. 지금도 책임감이 많이 크다고 했다. 학창시절에도 먼저 나서서 뭘 하자고 주도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반장 한번 한 게 다예요. 수줍음 많은 보통 학생이었지 나는.” 평소 집회에 대해서는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하는 거니까 좋은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그 ‘주체’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노동자들이 힘 있게 밀어주고 호응해주니까 분회장 자리가 스트레스 받아도 버틸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청소노동자들과 눈을 맞추며 웃는 모습에서 그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이 없었으면 잘릴까봐 무서움에 우리가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녀는 학생들이 있어서 자신이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며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처음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관심을 가져줘서 다행이라고 했다.

앞으로의 다짐에 대해서 물어봤다. “이제 칼자루를 몄으니까 죽으나 사나 해나가야지.”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면서 일한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는 그녀. 그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청소노동자들도 다함께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임금 명세서에는 연장수당과 휴게수당이 명시되긴 하지만, 실제노동시간과 비교했을 때 제대로 노동량이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추가수당을 받지 않는다고 여긴다.

오랫동안 쓰였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참고:

  1. 임금 명세서에는 연장수당과 휴게수당이 명시되긴 하지만, 실제노동시간과 비교했을 때 제대로 노동량이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추가수당을 받지 않는다고 여긴다.

오랫동안 쓰였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에 대한 12개의 생각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