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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위원 윤성주

 

광화문 횡단보도를 지나다 발에 밟힌 글자를 보았다.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 빨간색 페인트로 찍어낸 장애인들의 목소리다. 2017년, 대한민국 국민은 가로1.5cm, 세로1.0cm의 투표용지에 빨간색 기표용구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빨간색 페인트를 쥐고 국가가 보장해준 안전한 용지에서 벗어나 광화문 12차선,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는 일견 정의로워 보인다. 그러나 보편이라는 틀로 차이를 간과하고 배제시킨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닌 폭력이 될 수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차이를 간과한 방식으로 선거가 운영된다면, 장애인의 목소리는 투표용지에 담기지 못한다.

 

“우리를 즈려밟고 투표하십시오”

 

ⓒ연합뉴스

19대 대선 사전투표 둘째 날인 5월 5일 오후 서울 삼청동 주민센터, 2017대선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대선장차연)회원 10여명은 “우리를 즈려밟고 투표를 하십시오”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과 피켓을 들었다. 해당 주민센터의 기표소는 2층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엘레베이터가 설치되어있지 않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투표가 불가능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한 장애인은 휠체어에서 내려 기표소가 설치된 2층까지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기어갈 수조차 없는 또 다른 장애인은 현수막과 자신의 몸, 휠체어를 사슬로 묶으며 “투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쳤다. 1
대선장차연에 따르면 19대 대선 전국 사전투표소 3516곳 가운데 승강기나 휠체어리프트 등이 없어 장애인의 접근이 어려운 곳은 644곳(18.3%)이나 됐다. 서울의 경우 이런 곳이 424곳 중 160곳(37.7%)에 달했다.

 

대선장차연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장애인의 투표권을 보장하겠다는 간담회를 진행하고선 투표소 10곳 중 4곳을 장애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결정한 것은 장애인을 유권자로 인정한다고 보기 매우 어렵다”면서 “아무리 좋은 편의지원제도와 투표소, 투표소 환경을 만든다 할지라도 장애인이 들어갈 수 없다면 장애인의 투표권은 종잇조각과 마찬가지”라고 질타했다. 2

물론 정식 투표소로의 접근이 어려운 경우, 임시 기표소를 따로 설치하기도 한다. 그러나 급조한 기표소는 세우는 데에만 1시간가량이 걸린다. 또한, 기표소가 설치되더라도 전동휠체어가 들어가기 어려워 다른 사람이 대신 기표하는 경우가 있다. 직접투표와 비밀투표의 자유가 침해될 소지가 큰 것이다. 박경석 장차연 상임공동대표는 “임시기표소에 투표하라”는 선관위의 요구에 “나는 ‘임시적인 인간’이 아니다”라고 항의했다. 3

 

문제는 투표소 내부에도 산적해 있었다

 

ⓒSBS

설령 기표소 안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장애인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선, 투표 사무원에 대한 적절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투표 사무원이 시각장애 보조용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활동보조인제도 4를 알지 못해 동행한 활동보조인을 제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그냥 도와줄 테니까 몇 번 찍을지 말해라”라는 식으로 투표사무원이 대신 기표해 장애인의 직접투표, 비밀투표의 권리를 침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빈번하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투표 보조용구가 비치되어 있지 않거나, 혹 비치되어 있더라도 개개인의 시력과 맞지 않아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발달장애인은 투표용지를 인식하기 힘들어서, 청각장애인은 수어통역사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애인들은 자신의 표가 올바르게 행사되었는지에 대해 불안함을 느낀다.

“작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자처럼 생긴 보조도구를 주었지만 아무런 쓸모도 없었어요. 그 보조용구로 선거용지를 확대하면 선거용지에 표시를 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번 대선 때는 그러한 보조용구조차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또 투표용지를 접는 과정에서 대명사를 사용하며 여기를 이렇게 접으라고 하는데 저는 어떻게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투표를 하러 갈 때마다 제가 원하는 후보에게 제대로 표를 던졌는지 두려움을 느껴요” – 사회복지학과 2학년, 이민지 씨(시각장애)

장애인차별금지법 제27조(참정권)는 “참정권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정당한 편의제공을 의무화하고, 모든 정보를 장애인 아닌 사람과 동등한 수준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선관위는 사무원 교육과 투표용구 비치 등 최소한의 의무도 충분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

 

투표를 위해서는 정보가 필요하다

 

ⓒKBS

참정권은 단순히 ‘투표소에 가서 도장을 찍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투표하기 전, 공약 등의 정보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권리도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투표에 필요한 아주 기본적인 정보조차도 제대로 얻기가 어렵다. 시각장애인의 점자 공보물에는 오타는 기본이고 내용이 한 쪽만 적혀있는 경우가 있다. 발달 장애인은 기호와 이름만으로 후보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공보물 역시 투표권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실제로, 제19대 대선에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공보물을 별도로 제작한 후보는 없었다.
청각장애인의 어려움은 이번 대선 TV토론의 수화통역 논란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화통역사 한 명이 대선 후보자 다섯 명의 말을 통역했다. 토론에서는 두 사람이 대화하거나 다른 후보자가 치고 들어오거나, 여러 명이 동시에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한 명이 통역하다보니 어떤 후보자가 무슨 발언을 하는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현재 방송사들은 방송통신위원회 혹은 장애인복지법을 근거로 수화통역을 최소한으로만 지원하고 있다. 현 공직선거법은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이나 자막을 포함하도록 규정하지만 강제성이 없다. 따라서 방송사에는 수화통역을 개선할 법적인 의무가 없다. 방송사는 이를 개선하지 않는 근거로 일반 시청자들의 시청권 침해를 제시한다. 현재 수화통역 화면의 크기는 너무 작아 장애인 시청자가 해석하기 어렵다. 그러나 방송사는 수화통역의 영역이 기존의 크기를 넘게 되면 “시청자 입장에선 후보자인지, 수화통역사인지 혼동할 우려가 있다” 5라고 말했다. 마치 수화통역이 비장애인의 시청권을 희생해 장애인들을 배려해주는 것이라는 논리다. 장애인의 참정권은 배려가 아닌 당연한 권리다. 비장애인의 더 나은 시청권은 장애인의 기초적인 참정권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참정권과 시청권이 동일선 상에서 논의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장애인 참정권은 비장애인의 손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장애인 참정권에 대한 논란은 매 선거철마다 끊이지 않고 되풀이된다. 이번 제19대 대통령 선거 역시 마찬가지였다. 논란이 되풀이 된다는 것은 문제가 지속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1층에 설치된 투표소가 몇 퍼센트 증가했는지도 유의미하지만, 퍼센트 안에 담겨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릴 수많은 장애인도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제도는 장애인이 구성해야한다. 장애인이 겪는 어려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장애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제도를 구성할 때 장애인이 배제된다면, 당사자가 겪는 어려움은 본질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장애인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동등한 주체로 고려하지 않는 것이 장애인이 차별받는 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애인의 참정권 문제는 비장애인으로만 이루어진 기존 선거의 운영과 구성에 장애인이 함께 참여해야만 해결 가능하다. 경제학과 1학년 원철현 씨는 장애인 참정권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정권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한다면 장애인만의 특수한 제도도 만들어 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은 장애인 당사자의 권리뿐만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어요. 장애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모두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장애인과 공감을 통해 소통한다면 서로가 더 나은 인격체로 성장하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요?” – 경제학과 1학년, 원철현 씨(지체장애)

장애인 없는 장애인 참정권

참고:

  1. 각각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정훈 정책실장, 박경석 상임공동대표이다.
  2. “대선 사전투표 날, 장애인은 계단을 기어 올라가 투표했다”, <비마이너>, 2017년 5월 8일.
  3. “대선 사전투표 날, 장애인은 계단을 기어 올라가 투표했다”, <비마이너>, 2017년 5월 8일.
  4. 공직선거법 제157조 6항에 따라 장애가 있어 직접 기표할 수 없는 사람은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이 투표를 도울 수 있다.
  5. “5명 후보 수화통역하다 끝나면 실신할 지경…방송사는 왜 개선 노력 없나?”, <비마이너>, 2017년 4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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